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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의 엄마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야 댓글 0건 조회Hit 1,372회 작성일Date 20-05-14 14:03

    본문

    코로나 19로 말미암아 ‘집콕’이 상책인 시절이다. 모처럼 아내가 바깥나들이를 하고 돌아왔다.

    “아무 아무개들이랑 만났는데, 손주들 얘기를 했어.”
    “할머니들 손주 자랑에 신났겠네.”
    “원래 손주 자랑은 돈을 내놓거나 밥 사면서 해야 해요. 그런데 오늘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얘기였어.”
    “왜? 누구네 손주가 아프기라도 하데?”
    “그런 건 아니고......”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모임 중 한 분이 딸을 지척에 두고 육아를 돕는다. 딸에게 둘째가 태어나면서부터는 아예 첫째를 도맡아 키웠다. 둘째에게 사랑을 빼앗긴 녀석은 “할머니가 엄마였으면 좋겠다. 할머니, 진짜로 엄마하면 안 돼요?”라고 할 정도로 외할머니를 따랐다. 이런 붙임성 덕에 나날이 자라는 어린 녀석과 함께 보람도 커갔다. 지적 발달에도 엄마 못지않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제 녀석은 유치원에 다니며, 뿔이 솟기 전의 송아지마냥 천방지축으로 뛰논다. 대견스럽고 귀엽다. 그러나 그 뿔에 들이 받히면 아프다.
     
     화창한 주말 오후에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영산홍이 활짝 핀 단지의 벤치에 딸, 손주 둘과 함께 앉았다. 딸은 어린 둘째에 팔렸는데 첫째 녀석이 제 어미에게 붙어서 생떼를 쓴다. 딸도 딱하고 녀석도 안쓰러워 외할머니가 녀석을 구슬렸다.

     “이리 오너라. 외할머니가 놀아 줄게!”
     “싫어, 낡은 사람은 싫어.”

     어린애가 ‘낡은 사람’이라고 했는지, ‘늙은 사람’이라고 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고 했다. 어쨌든 달라질 것은 없다. 세상 모든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낡아간다. 그래서 ‘낡다’는 ‘늙다’의 원형이다. 낡은 것은 늙은 것이다.

     그야말로 촌철살인(寸鐵殺人)이다.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랴!
    꼬마 녀석은 진심을 말했을 따름이다. 녀석에게는 또래의 동무나, 활동적인 아빠가 필요했다. 마구 뛰어놀 상대 말이다. 엄마는 그 최소한이었다. 그런데 외할머니라니, 이 얼마마한 실망이었겠는가. 외할머니는 자신을 지탱해 주는 돌봄의 보루일지언정 놀이 상대는 이미 ‘아니다’라는 것이다.
    딸은 아들이 친정엄마를 어린 뿔로 들이받는 순간 소스라쳤다. 이 상황에 경악했다. 엄마의 돌봄 덕택에 안도하며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아들이 자신의 엄마에게 이런 패악(悖惡)을 부리다니! 아이 앞에서 이런 말을 내뱉어 본 적이 없다. 창졸(倉卒) 간에 딸은 엄마의 눈을 바로 볼 수가 없는 죄인이 되고 말았다. 어디서 들었을까? 누구에게서 배웠을까?
    친정엄마는 몹시 아프다. ‘낡은 사람은 싫어’라는 말이 맥놀이처럼 귓가에 맴돈다. 좀체 떨쳐지지 않는다. 친손자가 없는 바도 아니다. 외손자를 업고, 업은 아이 발이 시리니 빨리 가잔다는 말마따나 끔찍이 기른 녀석이다. 그러니만치 철없는 것의 생떼라고 치부하면서도 속내는 하릴없는 서운함으로 울렁인다. 먹고살기 바빠서, 생활이 어려워서, 내 자식들은 마음껏 보듬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 온갖 정성을 다 쏟아 사랑한다. 더 낡아버리기 전에, 더 후회하기 전에......, 그런데 낡은 사람은 싫어?
     
     말 한 마디에 울고 웃는 것이 사람살이다. 오로지 속절없는 세월이 야속할 뿐이다. 그러나 이 세월 속에서 아이가 자란다. 녀석의 생떼는 딱 ‘낡은 사람은 싫어’라고 외칠 그 ‘철’에 들었기 때문이다. 제 멋대로 행동하고 미운 짓을 서슴지 않는다. 이를 테면, 작은 질풍노도의 시기가 온 것이다. 이 때의 외할머니 품이야말로 녀석을 참답게 품을 둥지일 테다. 왜냐하면 녀석은 이 유년기에 자신, 세계, 타인의 관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즈음에 형성된 태도는 자신의 인생 설계로 발달하게 될 것이다. Eric Berne은 “인생 각본(life script)이란 개인의 가장 기본적이고 사적인 생활양식으로 생의 초기에 경험하는 외부의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해석으로 인해 만들어지고 결정된 행동반응 양식”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외모, 능력, 성격 등에 대해 다른 사람이 긍정적 태도를 보인다고 해석하게 되면 긍정적인 각본을 쓰게 되고, 반대의 경우에는 부정적인 각본이 짜일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지금 외할머니의 지지를 받으며 자라는 녀석은 승리자 각본을 쓰게 될 확률이 아주 높다.

    엄마의 엄마,
    그 어머니를 보면 그 딸을 안다. 예부터 며느리를 들일 때 어른들이 하는 말이다. 딸이 아이의 엄마가 되면, 딸의 엄마는 그 아이에게 엄마의 엄마가 된다. 엄마의 엄마, 외할머니라 불리는 여인이다. 그래서 “엄마의 엄마의 … … 엄마”로 이어지는 삶은 생명의 원천이다.
     당신의 생산지는 어디인가? 조선시대, 특히 16세기까지 혼인은 신랑이 움직이는 것이 관례였다. 신부는 그대로 자기 집에서 살고, 남자가 본가와 처가를 오갔다. 현재에 ‘장가들다’ 또는 ‘장가가다’고 하는 말도 장인의 집에 들어가는 혼례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아이들이 외가에서 태어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조선 초기 사림파의 영수(領袖)로 불리는 김종직(1431~92)도 어머니가 밀양 박 씨인 터라 밀양에서 태어났다. 자신도 혼인 후, 밀양을 떠나 금산 조 씨 부인을 따라 금산에서 살았다. 17세기 이후에야 시집살이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함으로 ‘엄마의 집’은 생명을 품는 공간이며, 엄마의 엄마는 생명의 원천이자 근원이다. 시인 서정주는 외할머니에게 느끼는 위로와 치유를 ‘뒤란 툇마루’라는 공간을 통해서 읊어낸다.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엄마의 꾸지람으로 가슴이 콩닥거릴 때면, 너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왜 그랬을까? 본래적 영혼을 비추는 ‘때 거울 툇마루’처럼 외갓집이 우리 생명의 원천임을 무의식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외할머니께서 약처럼 먹여 겁먹은 숨을 진정토록 해주는 ‘오디 열매’라는 치유의 힘을 품고 계셨기 때문이다.

    엄마의 엄마, 외할머니!
    어릴 적 나에게도 외할머니가 계셨다. 외할머니는 나에 관한 한 무조건 수용하고 지지하셨다. 나에게 친할머니는 세상에 안 계셨다. 그래서 할머니는 오로지 할머니일 뿐이다. 집에서 초등학교까지 족히 십리는 되었다. 학교에서 집까지의 도중에 샛길로 조금만 걸으면 외가였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해서 학교가 파할라치면 꼬맹이는 풀 방구리에 생쥐 드나들 듯 외갓집을 드나들었다. 외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할머니께서 내 양 손을 붙잡으시더니 “앞으로는 이리로 오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거라! 네 어미가 기다리니께.”하셨다. 곧이곧대로 믿고 따랐다. 어린 꼬맹이는 알아챘어야 했다. 자신이 외갓집 문턱을 무람없이 넘나든 까닭에 외숙모와 외할머니가 불편한 언사를 주고받았으리라는 것을! 그날 이후로 엄마의 치마꼬리에 매달려 가는 일 외에 혼자서 외갓집에 가는 일은 삼갔다. 그 대신 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오시는 횟수가 늘었다.
    중학교 입시를 앞둔 시기에 외할머니께서는 병치레하는 어머니 대신 여러 달에 걸쳐 우리 집 살림을 도맡아 하셨다. 식구 여럿에 가사노동이 무척 고되셨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나의 도시락은 특별했고 간식 또한 살뜰했다. 할머니께서는 새벽마다 묵주기도를 드리셨다. 묵주기도가 끝나면 일일이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축원하셨다. 나의 차례에는 길고 간절하셨다. 자는 척하면서 듣는 그 기도에 종종 눈시울이 붉었다.
     외할머니의 가르침은 단순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참을 인(忍) 자(字)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 결국 인내가 요체였다. 어릴 때 들려주셨던 ‘참을 인(忍)’에 관한 예화는 지금도 기억에 뚜렷하다. 할머니께서는 세상의 어느 교육자보다도 더 훌륭한 삶의 자세를 어린 손자에게 심어주신 것이다. 나도 옳고 너도 옳다는 인식을 통해서 공존과 협력으로 나아가는 참다운 자기실현의 방법을 가르치신 셈이다.
    내가 상경하여 대학에 입학할 때에도 외할머니께서는 속 고쟁이에 감춰두셨던 비상금을 쥐어주셨다. 꼭꼭 싸맨 흔적이 역력한 돈에 외할머니 냄새가 배어났던가. 그러하신 분께서 내가 스물셋 되던 해에 향년 칠십을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먼 하늘가, 그리워 기리다 하늘에 연(鳶)이라도 띄워 볼까나.

    속담에 ‘외손자를 귀애하느니 방아깨비를 귀애하라’는 말이 있다. 외손자는 애지중지 길러봐야  방아깨비처럼 쉽게 친가 쪽으로 가버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에 친가와 외가의 가름이 어디 가당키나 한가.

    엄마의 엄마
    생명의 샘이신 외할머니들이여, 잠시의 버릇없음을 너그러이 품으시라. 그리고 지지하시라. 그러면 품에서 자라난 후예들이 훗날 먼 하늘 끝, 엄마의 엄마를 기억하리라.

    2020. 05. 13.
    장  석  홍 라우렌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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