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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묵상] 그리스도인 삶의 원칙,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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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홍보부 댓글 0건 조회Hit 1,067회 작성일Date 20-09-14 17:1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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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고 청량한 하늘을 오래 올려다보았습니다.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푸른 하늘에서 우수수… 천국 이야기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습니다. 이 좋은 계절 9월에, 우리는 순교자 성월을 기념합니다. 온 교회가 한국의 순교자들께 마음모아 경하 드리고 그분들의 삶을 본받아 살고자 다짐하며 하늘의 은총을 청합니다. 그래서 더욱 오늘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진중히 다가오는데요. 발등에 떨어진 문제에 몰입하느라 하늘 한번 올려다보지 못하고 지내는 우리를 채근하는 듯 읽힙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하느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전혀 다르며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일깨우려 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잡다한 것에 마음이 묶이면 주님을 잊을 것이고 주님을 잃은 마음은 결국 주님의 뜻을 미루고 미루는 어리석음을 살게 될 것이란 경고로 들렸으니까요. 이런 마음에 스치듯 성녀 카타리나의 고백이 떠올랐습니다. “시간을 기다리지 마세요. 시간은 당신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푸념하는 우리, 무조건 양보하고 용서하기엔 억울하다며 머뭇대는 못난 마음을 얼른 치우지 않으면 용서의 때를 놓칠 수도 있다는 엄한 가르침을 단단히 새겨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씀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너무도 자주 스스로 증오심에 묶여 원망을 쏟아내며 지내기도 합니다. 매사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며 결국 절망하여 삶의 문제에 얽혀서 믿음인의 정체성을 잃고 상황에 이끌려 대충대충 살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의 요점은 주님께서 이르신 용서가 그저 속이 끓어오르고 분통이 터지는데도 억지로 참으라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하리라 싶습니다. 주님께서 이르신 용서를 살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큰 자비를 입은 자의 기쁨과 감사를 표출하는 것임을 일깨우고 계시니까요. 복잡하게 뒤틀려서 뒤숭숭한 마음을 말끔하게 정리 정돈할 수 있는 해결책은 오직 ‘용서’뿐임을 분명히 알려 주시니까요.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라는 엄중한 경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 안에 자리한 나쁜 것, 흉한 것,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들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는 상대를 판단하는 오만의 우를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 모두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에 민감하여 오직 감사드리며 지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들보 같은 내 죄에 비해서 티끌 같은 상대의 허물의 하잘것없음을 새기며 마음에 옹이를 남기지 않는 가벼움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지금 이 순간, 이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 덕분임을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임을 잊지 맙시다.

    따져보면 잘못한 상대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을 용서하겠다는 각오를 살아내기만 한다면 상대의 어떤 잘못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 어떤 상황도 너그러이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그걸 누가 모르냐 싶으십니까?” “좋은 주님의 말씀, 좋고 좋은 주님의 뜻을 누군들 실천하고 싶지 않아서 이러겠느냐?” 되물으십니까?

    맞습니다. 백번 옳은 항변입니다. 틀림없이 상대가 당신께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당신은 그로 인해서 손해를 입었고 무시를 당했는데 그는 자신의 허물을 도대체 인정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마음을 주님께서 이미 알고 계신답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아주 간단한 용서의 방법을 일러주십니다.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

    우리의 지난 잘못을 전혀 기억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당부가 이리 따뜻한데, 어찌 토를 달겠습니까? 다만 상대의 허물에 눈을 감으라고만 하시니 말입니다. 그저 상대의 잘못을 찾아내려 애쓰지 말고, 더 세세히 밝히려 들지 말고, 확실하게 확인하려는 생각을 삼가라고만 하시니 말입니다. 뿐인가요?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로마 12,19)고 단단한 약속까지 해주시니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의 요지는 용서야말로 그리스도인 삶의 원칙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용서를 살아내는 것은 하느님나라를 추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불변의 법칙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는 하느님의 변치 않는 뜻이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실천 사항이며 의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진리는 따지고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알게 해주셨으며 또 반성할 줄도 아는 존재로 빚어주셨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마음만 먹으며 얼마든지 도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질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께로부터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는 복음의 약을 공급받은 곳입니다. 교회인 우리에게는 세상의 모자람을 채워주며 끊임없이 보듬어 돌볼 수 있는 지혜의 명약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께서 쏟아주신 사랑을 아끼지 말고 나누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너끈히,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도 거푸 용서하는 고귀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주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의 원칙임을 깊이 새기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해주신 맑고 푸른 세상을 형편없는 생각과 지저분한 행색으로 덕지덕지 때를 묻힌 허물을 참회하기 바랍니다. 정말 순수하게 이웃을 사랑한 적이 있는지 곰곰이 되돌아보며 혼과 영과 몸을 정갈하게 가꾸면 참 좋겠습니다. 그렇게 주님께 받은 사랑을 축내지 않고 고스란히 전하는 정직한 믿음의 증표로 살게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하여 저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이 되는 순교자적 삶을 살아내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끝까지 사랑하고 일흔일곱 번을 용서하는 너그러움으로 하느님나라의 불변의 원칙에 충실하시길, 기도드립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성인이여!

    저희 한국교회의 모든 교우의 삶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 기쁨이 되도록 빌어주소서!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2020-09-08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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